닫기

글로벌이코노믹

[챔피언스리그] 원정 다득점 손흥민의 기적 아약스 토트넘 2-3, 챔스 결승

공유
2

[챔피언스리그] 원정 다득점 손흥민의 기적 아약스 토트넘 2-3, 챔스 결승

[글로벌이코노믹 김재희 기자]
토트넘과 리버풀이 챔피언스 결승에서 만난다.
토트넘과 리버풀이 챔피언스 결승에서 만난다.


손흥민(토트넘 홋스퍼)이 박지성에 이어 두 번째로 꿈의 무대로 불리는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 그라운드를 밟는다.
토트넘은 전반 5분 마테이스 더리흐트에게 헤딩 선제골, 전반 35분 하킴 지예흐에게 추가골을 얻어맞아 0-2로 끌려가다 후반 루카스 모라가 혼자 세골을 몰아넣어 3-2의 극적인 승리를 거뒀다.

지난 1일 홈 1차전에서 0-1로 패한 토트넘은 1, 2차전 합계 3-3으로 맞섰으나 원정 다득점에 앞서 창단 이후 처음으로 챔피언스리그 결승 진출을 이뤘다.

토트넘 리버풀의 챔스 결승은 6월 2일 스페인 마드리드의 완다 메트로폴리타노에서 단판으로 치러진다.

토트넘은 5월1일 영국 런던의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에서 열린 아약스와 UEFA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1차전 홈 경기에서 전반 15분 아약스의 도니 판더베이크에게 내준 결승골을 만회하지 못하면서 0-1로 패했다.

토트넘은 '해결사' 손흥민이 경고누적으로 빠지고, '골잡이' 해리 케인이 발목 부상으로 결장했다. 미드필더 해리 윙크스마저 사타구니 부상으로 수술대에 오르면서 사실상 '차포'를 뗀 상황으로 아약스와 상대했다.

아약스는 1900년 3월 18일, 암스테르담에서 창단되었다. 1911년, 클럽은 네덜란드 1부 리그에 승격되었으며, 1917년에 네덜란드 국가 컵대회인 KNVB 베커를 우승하면서 처음으로 주요 대회에서 우승하였다. 다음 시즌, 아약스는 처음으로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클럽은 1918-19 시즌에 리그를 우승하였으며, 네덜란드 축구 리그 선수권에서 무패우승을 거둔 유일한 팀이 되었다.
아약스의 첫 홈구장은 1911년에 목재로 지어졌고, "헤트 하우턴 스타디온" (목재 경기장) 으로 명명되었다. 아약스는 1928년 하계 올림픽을 위해 지어진 경기장에서 홈경기를 치르었다. 얀 빌스에 의해 설계된 이 경기장은 암스테르담 올림픽 스타디움으로 알려져 있다. 1934년, 아약스는 전 아약스 일원이자 건축가인 단 로던뷔르흐가 설계한 동부 암스테르담의 더 미르 스타디온으로 홈구장을 옮겼다. 경기장 수용 인원은 29,500명으로, 아약스는 이곳에서 1996년까지 홈경기를 치르었다. 클럽의 주요 유럽대항전과 국내 경기는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치르었는데, 이 경기장은 2배 더 많은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데 있었다.

1996년, 아약스는 도시 동남부에 위치한 암스테르담 아레나(현재의 요한 크라위프 아레나)로 홈구장을 옮겼다. 이 경기장은 암스테르담 시의회에 의해 $134M의 예산으로 지어졌다. 이 경기장은 52,000명 가량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다. 2006-07 시즌의 평균 관중은 48,610명이었고, 그 다음 시즌에는 평균 관중수가 49,128명으로 증가하였다. 이 아레나는 지붕을 개폐할 수 있는데, 이어지는 시기동안 신축된 현대적 유럽 경기장에 트렌드를 일으켰다. 네덜란드에서 아레나는 개폐 가능한 지붕이 개방된 상태에도 다량의 태양광과 신선한 공기로부터 많은 제한이 걸려 끔찍한 잔디 상태를 나타냈다. 2008-09 시즌, 그라운드 관리자들은 인공 광원 시스템을 도입시켰고, 본연의 문제를 대체적으로 해결하였다.

팬들의 사랑을 받던 더 미르 스타디온은 철거되었고, 토지가 시의회에 매각되었다. 현재 이 지역은 주거지로 사용되고 있다. 이 구 경기장에 남은 흔적이라고는 AJAX라는 글귀밖에 없으며, 현재 이는 요한 크라위프 아레나 근처의 유소년 훈련 구장인 더 토어콤스트의 건물에 위치한다.

토트넘은 1882년 9월 5일 화요일에 Mr. Cameron's School, 지역의 중등학교 학생, 그리고 당시 4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던 홋스퍼 크리켓 클럽(Hotspur Cricket Club)의 멤버들에 의해 창단되었다. 1883년부터 존 립셔(John Ripsher)가 초대 회장직을 역임했으며 1884년 현재의 클럽명인 토트넘 홋스퍼 FC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게 된다.

클럽명의 홋스퍼는 윌리엄 셰익스피어 작품의 극중 인물로도 등장했던 헨리 퍼시('해리 홋스퍼'로 더 많이 불린다.)에서 유래하였다. 해리 홋스퍼는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의 아들로 1402년 험블턴 언덕 전투(Battle of Humbleton Hill)에서 용맹함을 과시하며 스코틀랜드를 격파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국왕 헨리 4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1408년 슈루즈버리 전투(Battle of Shrewsbury)에서 전사했다. 퍼시 가의 직계 혈통은 1670년에 맥이 끊겼다.

전통적으로, 토트넘은 남색셔츠를 입고 플레이 했다. 클럽 창단 초기 즈음엔 하늘색과 흰색로 이뤄진 반팔셔츠나 빨간색셔츠와 파란색 반바지를 입었고, 초콜렛빛 갈색과 황금색 유니폼을 거쳐, 1899-00시즌에 이르러서야 그당시 높은 주가를 달리고있던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팀의 영향을 받고 마침내 흰색셔츠에 남색 반바지를 입게 되었다. 2011-12 시즌까지는 푸마가 다음 2012-13 시즌 부터 2016-17 시즌 까지 언더아머와 함께했고 2017-18시즌 부터 나이키가 새 유니폼 후원을 맡게 되었다.

1910년 FA컵 우승 이후로 토트넘 홋스퍼의 엠블럼은 싸움닭이 그려진 문장이었다. 해리 홋스퍼는 그의 싸움닭 발목에 박차를 달곤 했는데, 이것이 클럽 문장에 반영된 것이다. 토트넘의 상징인 닭은 일명 게임콕(싸움닭) 또는 코크럴(싸우기를 좋아하는 젊은이)이라 불리는 닭이다. 1909년 이전 토트넘 선수인 윌리엄 제임스 스콧은 축구공 위에서 서쪽을 바라보는 박차를 단 어린 수탉을 형상화한 청동 뱃지를 만들었는데, 그 후부터, 수탉과 축구공이 그려진 문양이 클럽의 주요한 상징이 되었다. 초기에는 방패안에 닭을 그려 넣었으며 1966년 부터 축구공 위에 서있는 닭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김재희 기자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