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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영원한 고향의 이미지, 살구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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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영원한 고향의 이미지, 살구꽃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데 갑자기 골목길이 환하다. 담장을 넘어온 가지에 살구꽃이 활짝 피어 골목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그 꽃을 보는 순간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고 한 이호우 시인의 시구처럼 단번에 나를 고향으로 이끌고 간다. 지금도 농촌 마을에 가면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꽃이 살구꽃이요, 고향의 죽마고우처럼 정겨운 꽃이다. 내가 어렸을 적에만 해도 시골마을엔 으레 몇 그루씩 살구나무가 있었다. 그래서 봄이 되면 초가지붕 위로 뭉게구름이 일 듯 피어올라 온 마을을 환하게 밝히곤 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어렸을 적 누구나 즐겨 불렀던 ‘고향의 봄’ 덕분에 일찌감치 친숙한 고향의 이미지로 자리 잡았지만 개인적으로도 살구꽃은 특별한 추억이 서린 꽃이다. 어렸을 적 고향집 뒤란에 수십 년 된 커다란 살구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봄이면 하굣길에 마을로 들어서는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고향집 초가지붕 위로 만개한 살구꽃이 제일 먼저 나를 반기곤 했다. 한 폭의 동양화처럼 너무도 아름답고 평화로운 정경이라서 고향을 떠나온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어제 본 듯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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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꽃

내 고향의 봄은 늘 살구꽃과 함께 시작되곤 했다. 살구나무가 몸살을 앓듯 한바탕 꽃 잔치를 치르고 나면 가지마다 푸른 열매가 달리고, 보리 이삭이 팰 무렵쯤이면 주황색으로 잘 익은 살구가 단내를 풍기며 장독대 위로 툭툭 떨어져 내리곤 했다. 학교에서 돌아와 어린 누이와 함께 뒤란에 떨어진 노란 살구를 주워 먹던 일들은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일찍이 ‘화화만필’을 쓴 문일평 선생은 살구꽃을 일러 요부와 같은 꽃이라 했지만 내겐 누이처럼 사랑스런 꽃이다. 보릿고개를 넘던 배고픈 시절이었음에도 그때를 생각하면 살구꽃의 환한 기억만 떠오르는 것을 보면 분명 꽃이 주는 축복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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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꽃

이렇게 고향의 이미지로 우리에게 친숙한 나무이지만 살구나무의 고향은 중국이다. 장미과에 속하는 과일나무로 기원전에 아르메니아 지방에 전파되었고 현재는 미국이 살구의 세계 최대 생산국으로 알려져 있다. 키는 5m에 달하고, 나무껍질은 붉은빛이 돌며 어린 가지는 갈색을 띤 자주색이다. 잎은 어긋나고 길이 6∼8㎝의 넓은 타원, 또는 넓은 달걀 모양으로 가장자리에 불규칙한 톱니가 있다.

꽃은 4월에 잎보다 먼저 피는데 연한 붉은 색이나 흰색에 가깝다. 지난해 가지에 달리고 꽃자루가 거의 없다. 꽃잎은 5장으로 둥글고, 수술은 많고 암술은 1개이다. 살구꽃은 매화와 흡사하여 헷갈리기 십상이다. 꽃 피는 시기는 매화가 조금 빠르긴 해도 요즘엔 그것도 믿을 게 못 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꽃받침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매화는 꽃받침이 꽃을 받치고 있는 반면에 살구꽃은 꽃받침이 뒤로 젖혀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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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꽃

행화촌(杏花村)이란 살구꽃 핀 마을이란 뜻이지만 그보다는 술집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중국의 만당(晩唐) 시인 두목(杜牧)의 ‘청명(淸明)’이란 시에서 유래되었다. 살구꽃 피는 청명 시절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니 길 가던 나그네가 마음이 쓸쓸해져 술집 있는 곳을 물으니 목동은 손을 들어 살구꽃 핀 마을을 가리킨다는 내용의 시다.

시만 읽어도 술 생각이 절로 나게 하는 절창의 시다. 살구꽃 필 무렵에 내리는 비를 행화우(杏花雨)라 불렀던 옛사람들의 낭만을 생각하면 행화촌도 운치 있게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내일 모레가 청명이자 식목일이다. 살구꽃의 낭만까지는 아니더라도 살아가면서 자기만의 꽃나무 한 그루쯤 심어보는 것은 누구나 누려도 좋을 마음의 사치가 아닐까 싶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