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에 한명 꼴로 죽어나갔다. 귀가 짤리고 20만리터의 최루액이 머리에 그대로 뿌려졌다. 사측 경비 용역과 직원들은 노동자들을 향해 쇠파이프를 휘둘렀고 소화기를 던지며 폭행했다. 경찰의 제지도 없었다. 세 번의 정권이 바뀌는 동안 국가는 그들을 버렸다.
지난 2009년 1월 상하이차가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상하이차의 먹튀논란이 터지고 석달이 지난 2009년 4월, 쌍용자동차는 경영악화를 이유로 건국 이래 최대의 정리해고에 들어갔다. 전체직원 중 35%에 달하는 2646명을 거리로 내몰며 대량해고를 단행한 것이다.
약 3000명의 노동자가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내쳐졌고 2009년 5월 21일 쌍용차 노동조합은 파업을 선언한다. 다음날 22일 그들은 평택공장 점거 총파업에 들어갔다.
9년간 그들을 ‘지옥’으로 몰아넣었던 호소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당시 공장 점거에 들어간 노조에 사측과 경찰은 무력으로 맞대응했다. 경찰과 사측은 경비 용역‧해고자들과 함께 일하던 동료들을 동원해 노동자들을 향해 새총을 쏘거나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온몸이 방패와 무기에 맞아 피 흘리고 있어도 무시로 일관했다. 해고 노동자들의 아내와 아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최루액에 맞아 고통스러워하는 어린 아이를 보고도 경찰은 대꾸하지 않았다. 공장 주변에는 헬기가 동원됐고 테이저건, 가스분사, 곤봉 등 테러 장비들도 등장했다.
사람들이 점점 죽어가기 시작했다. 조합원 엄모(42)씨가 신경성 스트레스로 뇌출혈로 사망했고, 희망퇴직자 김모(33)씨는 자신의 차 안에 번개탄을 피워 자살했다. 지부 정책부장 아내 박모(29)씨도 파업 장기화로 인한 우울증을 앓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됐다.
노조 간부를 포함한 22명이 구속되며 쌍용차 파업은 마무리되는 듯 했다. 그러나 이미 정부와 언론에서 만든 ‘폭력집단’ ‘범죄자’로 낙인 찍힌 그들에게 재취업의 기회를 주는 곳은 없었다. 이력서를 낸 회사에선 ‘우리 회사에 들어와서도 파업을 하는게 아니냐"는 비아냥 섞인 목소리가 돌아왔다.
2010년 11월, 쌍용차 정리해고자 153명이 해고무효 소송을 제기했다. 인도의 마힌드라 그룹이 쌍용차를 인수한 이후에도 갈등은 끝나지 않았다.
2011년 12월 7일 쌍용차 해고자들은 평택공장 앞에 희망텐트를 설치 후 또 다시 긴 싸움에 들어가게 되고 1년 뒤에 또다시 송전탑 농성에 나서게 된다.
이후로도 반복되는 해고자들의 농성과 “나는 일하고 싶다”는 외침이 계속됐지만 그들의 요구는 묵살됐다.
2013년 1월, 노사간 무급휴직자 454명 전원을 복직하는 데 합의를 이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해고자들은 많았다.
2009년 정리해고 사태 당시부터 만 9년동안 30명에 이르는 노동자와 가족이 목숨을 잃었다.
끝이라곤 보이지 않던 쌍용차 사태는 지난 7월 해결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인도 마힌드라 그룹 아난드 회장을 만나 “쌍용차 해고자 복직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요청하면서 사태 마무리에 가닥이 잡혔다.
사측은 지난 13일 노‧노‧사‧정 간 해고자 복직 교섭을 재개키로 합의했고 최종식 쌍용차 사장은 해고사태 9년만에 대한문 분향소를 첫 방문했다.
그리고 14일, 쌍용차 사태가 드디어 마침표를 찍었다.
쌍용차 사측과 노동조합, 금속노조, 대통령 소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는 이날 서울 광화문S타워 경제사회노동위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해고자 전원 복직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이날 발표에 따르면 119명 가운데 60%는 올해 말까지, 나머지는 내년 상반기 말까지 단계적으로 채용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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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햇수로 10년만에 쌍용차 사태는 매듭을 짓게됐다. 이들은 119명 전원 평택공장으로 돌아간다.
30명의 희생자와 맞바꾼 그들의 일자리, 갈등은 마무리됐지만 풀어야할 과제는 남아있다.
우리 사회에 많은 상처와 아픔을 남긴 사회 문제인만큼 경영정상화를 이룰때까지 해결해야할 숙제들이 산적해있다.
노조원들의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을 수 있도록 우리 대한민국에 제2의, 제3의 쌍용차가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황이진영 기자 hjyhjy124@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