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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래의 파파라치] 공간과 시간의 지배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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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래의 파파라치] 공간과 시간의 지배자들

김시래(정보경영학박사, 트렌드라이터)
김시래(정보경영학박사, 트렌드라이터)
월드컵이 종반을 향해 치닫고 있다. 아시아 진출국들의 성적표는 초라하다. 일본만 체면치레 했을 뿐이다. 우리나라도 선전했고 이변도 일으켰지만 끝까지 살아남기엔 역부족이었다. 우리도 독일을 이기는 것이 최종 목표는 아니었으니 마찬가지다.

왜 늘 이쯤까지 일까?
남미의 성적을 보면 몸집이나 신장을 탓할 일도 아니다. 근본적인 기술력의 차이를 지적하곤 하지만 수십년 간 계속되는 부진에는 뭔가 뿌리 깊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축구경기 도중 해설자가 뒷공간을 놓쳤다며 흥분하는 걸 자주 본다.

축구는 둥근 공의 쟁탈전으로 보이지만 본질은 공간 지배의 각축장이다. 개인기를 이용해 상대를 돌파하든, 동료의 패스를 통해 전진하든, 90분의 전 과정은 슛하는 공간을 포착하기 위한 고단한 경로다. 홍명보나 기성용 선수가 시야가 넓다는 말은 공간을 전체적으로 운용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말이다.

프리킥도 마찬가지다. 킥커가 찬 볼은 스크럼을 짠 수비벽의 위나 옆의 공간을 지나 골키퍼의 손이 미칠 수 없는 골대의 빈 공간으로 향해야 한다. 수비수는 공의 진입로를 두꺼운 철벽으로 지키는 공간의 수호자다.

마지막 보루 골키퍼는 누구인가? 조현우의 선방을 떠올려보라. 그는 자신이 점유한 골대의 빈 공간을 뚫기 위해 날라온 공을 향해 몸을 날리고 손과 발을 써서 공의 궤적을 차단했다.

결국 축구 강국은 공간의 지배자들이다. 독일이나 잉글랜드같은 유럽식 축구는 빠른 스피드를 이용한 측면 돌파와 정확한 로빙 패스에 의해 머리 위의 공간을 장악한다.

반면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같은 나라는 현란한 개인기와 정밀하고 빠른 패스로 지축 위의 공간을 새롭게 설계한다. 결론적으로 축구 능력이란 공간의 창출력과 방어력이다. 이런 관점이 수긍되고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합당한 원인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다음 월드컵의 성적표도 비슷할 것이다.
우리의 공간 창출 능력이 뒤떨어지는 것엔 뿌리 깊은 역사적 배경이 있기 때문에 체질 개선이나 훈련에 의해 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무슨 이야기냐고? 아시아권은 온전히 농경 문화의 전수자들이다. 농경은 압도적으로 시간(Timing)의 영향 아래 놓인다. 비가 오는 때, 햇볕이 드는 때, 바람이 부는 때를 가려서 경작해야 곡식의 낱알이 굵어지고 과실이 풍성하게 열린다. 음력의 절기란도 그래서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시중(時仲)' 이라고 인생사도 타이밍이라고 했을까. 농경 문화의 후손들, 시간의 지배자들이 당당하게 어깨를 펴는 스포츠가 양궁이다. 활시위를 당기고 과녁을 쏘아볼 때 궁사는 활에 대한 몸의 장악력과 표적을 향해 날아가는 활에 대한 공기의 저항을 계산한다. 내 몸 밖의 바람과 내 몸 안의 호흡이 일치되는 균형점을 찾은 순간 활시위를 쏘아 올리는 것이다.

요약하면 월드컵의 연이은 부진은 공간 장악력이 필요한 축구 경기에 양궁이나 사격, 골프에나 필요한 우리의 타이밍 감지 능력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우린 계속 들러리나 서야 할까? 여기 한 가지 아이디어를 보탠다. 축구를 양궁처럼 해보면 어떨까? 울둘목으로 진입하는 왜적의 선단을 노려보며 공격의 타이밍을 기다린 이순신장군의 노림수를 차용해보자는 이야기다.

무슨 이야기냐고?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 했다. 독일전으로 돌아가보자. 거칠고도 단단한 우리의 빗장수비가 전반 내내 이어졌다. 때를 기다린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독일선수들은 초조해졌다. 그 순간 그들의 집중력이 흔들렸고 공간이 열렸다. 골키퍼까지 뛰어나온 순간 공간은 텅 비어 있었다. 시간 싸움에 승리했고 두 번째 결정타가 가해졌다. 강적을 맞아 시간을 벌어 급습의 타이밍을 노렸던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의 전략은 주효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체질에 맞는 타이밍의 기술을 축구에 접목시켜 우리 스타일을 축구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기술의 부족함을 정신력으로 극복하려면 체력이 우선 되어야 한다는 축구 전문가의 하나마나 한 아침 방송을 듣고 머리를 쥐어짜 몇 자 적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선결해야 할 조건이 있다. 축구협회나 그 주변 관계자들의 순수하고도 건강한 열정이 그것이다. 이해타산에 눈이 멀어 유능한 감독이나 능력 있는 선수를 선발하지 못한다면 전략이 무엇이건 백약이 무효일 테니까.


김시래(정보경영학박사, 트렌드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