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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영혼이 자유로운 조리사'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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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영혼이 자유로운 조리사'가 되고 싶다"

[한국의 맛] 김용휘 헤럴드올가니카 수석 페이스트리 셰프

미국이민 1.5세로 부모님들 음식DNA 이어받아


맨해튼 42번가 명물 '시프리아니' 무작정 찾아가


초인적 노력 끝에 1년만인 19세 때 야간작업 총책


'NO'를 불허하는 카리스마로 '주방의 악마' 별명

살아남은 3명 세계 유명 레스토랑에 스카우트 돼


▲김용휘페이스트리셰프
▲김용휘페이스트리셰프
[글로벌이코노믹=노정용 기자] 김용휘 헤럴드올가니카 수석 페이스트리 셰프는 미국이민 1.5세로 진짜 조리사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시간 단위가 아닌 분 단위로 스케줄을 짜고 출근 시간에 1초만 늦어도 그만두게 하는 카리스마와 철학은 온전히 그의 경험에서 나왔다. 때문에 셰프로서의 마음가짐과 요리를 대하는 태도, 주방에서의 활동은 한국의 여타 셰프와는 다르다.

그의 몸에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요리DNA가 있다. 미국으로 이민을 가 요식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부모에게서 자연스럽게 요리를 배웠고, 미슐랭3스타 셰프 아래에서 일하며 최연소 셰프로서의 기록을 써나갔다. 하지만 그는 셰프라는 이름에 갇히지 않은 영혼이 자유로운 요리사를 꿈꾸고 있다. <편집자 주>

-언제부터 요리를 하셨는지요?

“부모님이 미국 요식업계에서 총괄매니저로 활동하고 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요리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열넷 살 때부터 요리를 시작했지요.”

-셰프가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운동을 좋아해 고등학교 시절 유도를 했어요. 그런데 허리를 다쳐 운동을 할 수가 없다는 생각에 슬럼프에 빠져 배낭여행을 떠났어요. 여행 도중 우연히 에머럴 라가시 셰프가 미국 케이블TV 방송인 푸드네트워크에서 요리토크쇼를 진행하는 것을 보았어요. 갑자기 ‘저것 해야지’ 하는 생각이 번뜩 떠올랐어요. 일단은 요리를 계속해왔으니까 다른 어떤 일보다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고요. 3년 안에 에머럴 라가시 같은 최고의 셰프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어요.”

-재미로 하던 요리와 셰프로서 하는 요리가 달랐을 텐데….

“우선 마음가짐을 달리했어요. 저에게 인생의 다른 출구가 없다는 압박감은 며칠씩 밤샘을 하면서도 견딜 수 있는 힘이 되었어요. 보통은 레스토랑에 들어갈 때 면접을 보고 가지만 저는 제가 원하는 곳을 무작정 찾아가서 일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어요. 유명인과 연예인이 자주 찾는 뉴욕 맨해튼 42번가 시프리아니의 뒷문으로 들어가서 총주방장에게 요리를 하고 싶다고 했어요. 면접 약속을 한 것도 아니고 무작정 찾아갔지만 요리에 대한 저의 열정을 높이 사 일단은 일하게 해주었어요.”

-시프리아니는 직원이 수백 명이나 되는 유명 레스토랑 아닙니까?

“이탈리아 요식업계의 재벌이 운영하는 곳입니다. 이탈리아인 여성 총주방장이 ‘내가 한 번 트레이닝을 시켜보겠다’고 한 후 말할 수 없는 고된 일의 연속이었어요. 새벽 4시에 일이 끝나도 아침 7시에 다시 출근해서 일해야 했어요. 식당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일하는가 하면, 일주일에 밤낮을 두서너 번 바꾸니 초인적으로 견뎌야 했어요.”

-어떻게 살아남았습니까?

“전 직원이 남미와 이탈리아 출신이었고 아시아인으로는 유일했어요. 레스토랑의 스케줄을 따라가다 보면 자주 하는 일에는 익숙해지겠지만 ‘스타 셰프’가 되는 데 필요한 스킬을 익힐 수가 없어요. 동료보다 2~3시간 먼저 출근해 선배들이 밀가루 반죽하는 걸 보고 그 다음날에는 그대로 따라해보는 일을 1년 간 반복했어요. 그렇게 했더니 1년 만에 열아홉 살에 불과한 저에게 야간 작업 총괄을 맡기더군요.”

-거의 잠 잘 시간도 없는 살인적인 스케줄인 것 같은데요.

“진짜 그랬어요. 잠을 잘 시간이 늘 부족해 지하철을 타면 서서 잠이 들곤 했어요. 너무 잠이 부족하니 얼굴이 하얗다 못해 파래졌어요.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아요. 그러나 그때는 너무나 재미있었고 많은 걸 배웠어요.”

-미슐랭2스타인 펄새로는 어떻게 옮기게 되었나요?

“잡페어에서 펄새의 총괄 셰프를 만났어요. 그후 2주일 동안 하루에 서너 번씩 그에게 전화를 해 일하게 해달라고 졸랐어요. 거기서도 정말 죽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어요. 밤 9시부터 시작해 낮까지 일하고, 그 다음날은 새벽 4시에 출근하고…. 몸이 적응할 때쯤이면 또 주야간이 바뀌었어요. 초호화 파티에 빵으로 데코레이션을 하는 일도 재미있었고, 저에게 셰프의 꿈을 키워주었던 스타 셰프 에머럴 라가시도 직접 만났어요. 1년 반 만에 부주방장으로 승격되었고, 인원 감축 때에도 살아남아 부숀 베이커리까지 맡게 되었어요. 인원이 부족해 반죽도 하고 오븐도 돌리고, 뒤에서는 도넛도 튀기고 정리도 하는 등 6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 했어요. 너무나 바빠 스케줄을 짤 때 시간 단위가 아닌 분 단위로 짜야 했어요.”

-배움에 대한 갈망이 뉴욕 포스트지 4스타 레스토랑 오시아나로 옮기게 했나요?

“한 레스토랑에서 노하우를 습득했으니 또 다른 레스토랑에서 뭔가 배우고 싶었어요. 이번에는 레스토랑 오시아나에서 와인 빵을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왔어요. 프랑스에 가면 와인을 만들고 남은 포도 찌꺼기가 많은데, 글루텐이 없어 접착이 되지 않아요. 레드와인 빵을 만들어준 뒤 노부57의 디저트 총괄 셰프로 들어갔어요.”

김용휘 셰프는 노부57에서 세계적인 스타 셰프 가브리엘라 리바를 만난다. 취직하기 위해 그를 만나러 갔지만 처음엔 아는 척도 하지 않더라고 한다.

“면접을 보러 갔는데, 저를 주방에 세워두고 가브리엘라 리바는 자기 요리만 하는 거예요. 총괄 셰프가 직접 요리하는 것도 처음 봤지만, 1시간 동안 즐겁게 춤을 추듯이 요리를 해요. 얼마나 멋진 솜씨를 발휘하던지 옷에 요리한 흔적이 하나도 묻어나지 않을 정도로 깔끔했어요.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1시간 만에 하는 첫 한마디가 ‘네 이름이 뭐냐’였어요. 그러고는 ‘잠깐 기다리라’ 하고 다시 요리를 하더군요. 1시간 후에 다시 ‘여기 왜 왔어?’라고 묻고는 또 요리를 하며 기다리게 했어요. 아무 말 없이 세 시간 동안 자신의 요리를 하며 저를 관찰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제야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고 하고서도 ‘세프를 뽑지 않는다’고 해요. 정말 당황스러웠어요. 그는 셰프가 아니라 요리하는 일을 즐거워하는 사람을 뽑는다는 거지요. 최연소 셰프에, 최연소 부총주방장을 지낸 저로서는 충격 그 자체였어요.”

-가브리엘라 리바 셰프에 대해 더 이야기해주시죠?

“할아버지 때부터 3대째 요리를 하고 있는 이탈리아 출신 셰프예요. 지금까지 저의 멘토로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어요. 프랑스, 이탈리아, 중남미, 일본, 오세아니아 등의 다양한 식재료를 사용했어요. 한 가지 메뉴를 만들 때 보통 2~3주 걸리는데, 가브리엘라 리바 셰프는 그 사이에 수십 종의 메뉴를 탄생시켜요. 특히 명상을 하듯 가만히 서 있다가 메뉴를 만들어내는 걸 보면 내공이 보통이 아니지요. 머릿속에서 다양한 식재료를 섞어 이미지로 메뉴를 만들기 때문에 재료 낭비도 거의 없어요. 프로 중의 프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셰프, 셰프’ 라고 부르면 그만 좀 하라고 짜증을 내요. 자신은 셰프가 아니라 ‘갭’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해요. 단독직입적으로 ‘왜 셰프를 싫어하는냐’고 물었더니, 그는 ‘나는 예술가이며 사상이 자유로운 사람이다(I am a artist, and a freeman)’고 답해요. 그러면서 자신을 셰프라는 타이틀로 묶어두지 말라는 거예요.”

-한국에는 언제 오셨습니까?

“2011년 한국에 와서 적응하기가 너무 힘들어 대사관에서 일했어요. 제가 그동안 배운 경험을 적용해볼 때 한국의 조리사들은 너무 큰 착각을 하고 산다는 느낌입니다. 한국의 조리사들이 힘들다고 불평하는데, 사실 영국이나 미국의 조리사들이 힘들고 한국의 조리사들은 가장 편한 쪽에 속합니다. 셰프 복장 하나만 보아도 그들은 옷에 구김이 가 있으면 그날 요리를 안 합니다. 유니폼이 요리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철저하지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짧은 양발을 신거나 반바지를 입고 있거나 심지어는 단추가 풀려 있어요. 게다가 가장 중요한 요리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 하고 있어요. 이처럼 셰프 문화가 달라서 적응하기가 힘들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지금도 요리 공부를 합니까?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요? 본격적으로 요리를 배우겠다고 결심한 후 2시간 이상 공부하지 않은 적이 없어요. 노트에 메모를 하기도 하고, 요리 색감을 살리기 위해 쉬는 날이면 미술관으로 달려갑니다. 그림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뉴욕 모마, 메트로폴리탄, 시립미술관에 가서 이 색과 저 색을 디저트에 응용하지요.”

-조리사를 뽑을 때 어떤 점을 물어보나요?

“4가지만 물어봅니다. 첫째, 요리를 좋아하십니까? 둘째, 어떤 요리를 좋아하십니까? 셋째, 요리 아니면 죽을 것 같습니까? 넷째, 내일 당장 출근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4가지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요리가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면 빨리 포기하고 다른 일을 찾으라는 뜻에서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요리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일을 통해 할 수가 있으니까요.”

-면접을 통과하면 끝까지 몇 명이나 남습니까?

“3개월 간 로테이션 하며 60명이 바뀌었어요. 덕분에 제 별명이 ‘악마’입니다. 사생활에서는 존경하지만 주방에 들어가면 전혀 웃지 않고 철저하게 명령체계에 따라 일하게 합니다. ‘잠시만, 셰프!’ 하거나 ‘노! 셰프’라고 하면 안 됩니다. 레시피는 한 번만 불러주기 때문에 집중하지 않으면 못 따라옵니다. 처음에는 동료들끼리 레시피를 나누어 외워서 하다가 집중하면 다 알아듣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주방에서는 나이에 상관없이 존댓말 대신에 반말을 하게 합니다. 이런 혹독한 훈련 탓인지 끝까지 살아남은 조리사는 여성 3명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들은 일본, 캐나다 등으로 스카우트 되어 갔어요.”

-친구도 없고 별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가요?

“친구가 없는 건 아니지만 많지는 않아요. 친구들 사귀는 시간에 요리만 했으니까요.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겨울 3개월 동안 해를 본 적이 없어요. 또 하루에 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고요. 3년 전 위암수술까지 했지만 사람을 살리고 죽이고 하는 요리를 함부로 대하는 게 싫었어요.”

-셰프의 자세는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요?

“셰프는 식재료를 선택하는 순간부터 고객의 입 안으로 들어가 소화하는 순간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봅니다. 가령 지하 주방에서 푸드 엘리베이터로 타르트를 올려보냈는데, 과일이 넘어져 있다면 이건 셰프가 책임을 져야 해요. 억울하다고 변명을 할 수도 있겠지만 셰프라면 진동을 감안해서 요리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동료나 후배들로부터 욕도 많이 먹을 것 같은데….

“주방에서는 악마 노릇을 하지만 그곳을 벗어나면 절대 그러지 않습니다. 그래도 스트레스를 풀어야 하니까 제가 없는 곳에서는 실컷 욕하라고 합니다. 한번은 가족들이 놀러와 화장실에서 직원들이 저에 대해 욕하는 것을 듣고 놀랐다고 해요. 그러나 나중에 셰프가 되면 제가 왜 그렇게 엄격하게 했는지 이해할 것이기 때문에 욕을 먹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셰프로서 잘난 척할 수 있을 만큼 실력을 쌓으라고 말하는 김용휘 셰프. 젊은 나이에 조리사가 아닌 셰프가 된 그는 후배들도 영혼이 자유로운 셰프가 되기를 바란다. 요리를 한다고 해서 셰프라는 타이틀을 붙일 수 있는 게 아니라 훌륭한 요리를 할 때 셰프라는 타이틀이 주어진다고 말하는 그를 보면서 진짜 프로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