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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고수(高手)'는 '고수(鼓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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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고수(高手)'는 '고수(鼓手)'다

[심리학자 한성열의 힐링마음산책(4)]

상대가 말을 많이 하도록 '말길' 닦아주는 鼓手가 필요


이야기 나누며 적당한 '추임새' 넣으면 마음이 통하고


서로 외치기만 하면 소음만 있는 '疏通 없는 사회' 초래


▲판소리명창기획공연
▲판소리명창기획공연
[글로벌이코노믹=한성열 고려대 교수] 판소리는 1964년 12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으며, 2003년 11월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세계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되어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만큼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우리의 전통 음악이다. 판소리에는 세계 어느 음악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판소리의 가장 큰 특징은 극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을 ‘명창’ 한 사람이 다 맡아서 부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페라나 뮤지컬에는 각각의 배역을 담당하는 가수가 정해져 있고, 자신의 역할만 노래하면 된다. 하지만 판소리에서는 명창 혼자서 춘향이도 됐다가 이몽룡이도 됐다가 방자와 향단이가 되기도 한다. 보통 판소리 한마당을 완창하는 데 빨라야 다섯 시간쯤 걸린다고 한다. 그렇다면 판소리 명창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힘으로 혼자 대여섯 시간 여러 배역을 넘나들며 소리를 할 수 있을까?

판소리에서 소리하는 창법이나 오페라에서 노래하는 창법의 차이에서 올 수도 있겠고, 명창의 피나는 노력과 훈련의 덕분일 수도 있다. 하지만 판소리와 오페라에서의 가수와 청중 간의 의사소통 양식을 보면 현격한 차이가 있다. 보통 오페라를 위시한 서양 음악에서 청중은 무대 위에서 진행되는 연주에 몰입하고 감상한다. 그 과정에서 청중은 가능하면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연주자들이 자신의 연주에 몰입할 수 있도록 조용한 분위기를 만들어주도록 노력한다. 기침 소리는 물론 숨소리조차 죽여주는 것이 올바른 감상 태도다.

이에 비하면, 판소리에서 청중은 명창의 소리에 몰입하고 감상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자신이 소리에 몰입하고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올바른 감상 태도라고 여겨진다. 이런 활발한 상호작용 분위기 속에서 명창 스스로도 청중과 하나가 됐다는 느낌을 받아 더욱 힘이 나서 소리를 할 수 있게 된다.

판소리를 즐겨 듣는 사람들 가운데 단순한 애호가 수준을 넘어 소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지식을 바탕으로 소리를 제대로 감상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귀명창’이라고 까지 부른다. 명창에 버금간다 해서 ‘귀명창’이라고 하는 데, ‘귀명창이 좋은 소리꾼을 낳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판소리에서 중요한 존재다. 즉, 청중과의 적극적인 소통이 명창에게는 아주 중요한 에너지 원천이 된다.

고수(鼓手)는 소리길을 닦아주는 사람


명창과 더욱 더 적극적이고 긴밀한 의사소통을 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고수(鼓手)’다. 판소리에서 고수의 역할은 단순한 반주자의 역할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소리의 장단을 조절해서 소리가 빨라지거나 느려지는 것을 보완하기도 하고, 추임새로써 명창과 청중 사이에서 소리판의 분위기를 이끌어 가기도 하며, 명창이 사설을 잊어 버렸을 때 빨리 사설을 일러 주기도 해야 하고, 명창의 상대 역할도 해야 하는 등, 그 기능과 역할이 중요하고도 어렵다. 고수가 이 역할을 얼마나 잘 해 주느냐에 따라 명창의 소리가 달라지고 힘을 얻을 수 있는지의 여부가 결정된다. 그래서 판소리 분야에서는 ‘일고수 이명창(一鼓手 二名唱)’이라고까지 한다.
▲판소리의고수는명창이소리를잘하도록'소리길'을내주는사람이다.우리대화에서도고수는판소리의고수와같이'말길'을내어주는사람이다.
▲판소리의고수는명창이소리를잘하도록'소리길'을내주는사람이다.우리대화에서도고수는판소리의고수와같이'말길'을내어주는사람이다.
고수가 명창과 나누는 의사소통은 주로 ‘추임새’를 통해 이루어진다. 추임새는 소리 도중에 고수 또는 청중이 발하는 ‘얼씨구’, ‘좋다’, ‘잘 헌다’, ‘으이’, ‘그렇지’, ‘아먼(암)’ 등의 감탄사를 가리키는데, 물론 판소리뿐만 아니라, 민요나 잡가 등 다른 우리의 소리에서도 볼 수 있다. 추임새는 자기 흥에 겨워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행되는 소리의 분위기와 감정에 알맞게 그리고 적당한 순간에 해야 그 효과가 극대화된다. 따라서 소리가 슬플 때에는 추임새도 슬프게 해야 하며, 즐거운 대목에서는 추임새도 힘차고 흥겹게 해야 한다. 그래서 청중을 대신하여 전문적으로 이 추임새를 넣어주는 고수를 잘 만나야 흥이 나고 명창은 청중과 혼연일체가 되는 감흥을 맛보게 된다.

만약 고수가 적당한 시기에 추임새를 넣지 않거나, 현재 명창이 표현하고 있는 대목의 감정과 일치하지 않는 추임새를 넣는다면 명창은 점점 고수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고, 고수가 이끌어주는 대로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힘이 많이 들 수밖에 없다.

한국적 정서를 잘 살린 명화로 꼽히는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라는 영화에서도 고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이 잘 그려져 있다. 고수의 역할에 불만이 많아 열심히 연습하지 않는 아들을 꾸짖으며 아버지가 일갈을 한다. “북을 치기만 한다고 다 고수가 아니다. 고수는 소리길을 닦아주는 사람이다. 고수가 소리길을 잘 닦아주어야만 명창이 안심하고 그 길을 갈 수 있다.”

대화를 잘 하는 사람은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방이 말을 많이 하도록 유도하는 사람, 즉 말길을 잘 열어주는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판소리에서의 고수의 역할을 잘 하는 사람이 대화를 잘 하는 사람이다.

좋은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첫째, 자신의 역할은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명창이 소리를 잘 하도록 돕고 이끌어주는 것이라는 점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둘째, 명창의 소리를 잘 들어주는 것이다. 잘 듣는다는 것은 소리의 내용뿐만 아니라, 소리에 내재되어 있는 감정을 공감하는 것이다. 셋째는 자신이 명창의 소리에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적재적소에 적당한 추임새를 통해 알려주어야 한다.

▲드라마'덩굴째굴러온당신'의한장면
▲드라마'덩굴째굴러온당신'의한장면
대화를 잘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대화를 잘 하려면 첫째, 자신의 역할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말을 잘 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둘째,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말의 내용보다도 말하는 사람의 감정을 잡아내고 그 감정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로 자신이 감정적으로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정확히 표현하고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한 마디로 하면, 대화를 잘 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감정을 계속 표현할 수 있도록 ‘말길’을 닦아주는 사람이다.

옳은 말만 하는 사람은 불편한 사람


얼마 전 방영된 ‘부부간의 갈등’을 주로 주제로 다루는 한 드라마에서 한 부부의 대화를 인용해 보자. 남편은 회사에 다니고 월급을 받아오며, 전업주부인 부인은 이 수입으로 알뜰히 살림하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이다. 어느 날, 퇴근한 남편이 서류가방을 소파에 던지며 약간 화난 듯이 말한다.

남편: 에이, 내일부터 회사 안 간다.


부인:(놀라며) 그럼 우리 집은 뭐 먹고 살게요?


남편:(조금 큰 소리로) 내가 돈 버는 기계야?


부인:(더 안타까운 듯이) 당신 혼자 회사 다녀요?


이 대화는 결국 남편이 화를 버럭 내면서, “당신하고 이야기하느니 차라리 벽 보고 이야기하는 게 더 낫겠다”라고 말하며 안방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끝났다. 왜 이런 결말이 나왔을까? 부인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울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한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은 ‘옳은’ 말이기 때문이다.

남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부인이 야속하다고 느끼면서 화가 났을 것이다. 이런 식의 대화가 계속되면, 이 부부는 점차 깊은 속마음을 주고받는 대화를 하지 않게 될 것이고, 결국에는 대화가 끊어지게 될 것이다.

▲연극'그와그녀의목요일'의한장면
▲연극'그와그녀의목요일'의한장면
부인의 잘못은 틀린 말을 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인은 아주 옳은 이야기를 했다. 부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남편이 화내는 이유는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부인에 대한 야속함에 있다는 것이다. 즉, 부인은 ‘회사에 안 간다’는 말의 내용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그런 말을 하는 남편의 마음, 즉 감정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이런 경우, 거의 대부분의 남편은 화가 난다. 사실 자신이 회사에 안 다니면 가정이 어려워질 것이라는 것을 몰라서 ‘회사에 안 간다’고 이야기하는 남편은 없기 때문이다.

이 대화를 다른 식으로 해보자.

남편: 에이, 내일부터 회사 안 간다.


부인: 당신 오늘 회사에서 속상했나보네요.


남편: 그래. 왜 우리 과에 김대리 있잖아?


부인: 아, 김대리 때문에 화가 났군요?


아마도 위 대화처럼 부인이 남편의 감정에 주위를 기울이고 ‘속상하다’, ‘화가 나다’ 등 남편의 감정에 공감한다는 표현을 했다면 남편은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부인에게 이야기하면서, 그 과정에서 스스로 감정을 해소했을 것이다. 물론, 그 다음 날 부인이 채근하지 않아도 출근했을 것이다.

이처럼, 대화에서도 ‘추임새’가 필요하다. 적절한 시간에 적당히 이루어지는 추임새는 대화의 윤활유 역할을 하고 흥이 나게 하는 마법의 힘을 가지고 있다. 크게는 국가 간의 외교에서부터 작게는 친구들 사이에 간단한 대화에서도 추임새를 잘 넣어주는 고수가 절실히 필요하다. 우리 모두 자신이 명창이 되려고 애쓰기 때문에 힘만 들 뿐만 아니라, 들어주는 사람이 없고 서로 목청껏 외치기만 하는 ‘소음(騷音)만 있고 소통(疏通)이 없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다.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