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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몰아치는 황무지와 초원의 원형 그대로 보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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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몰아치는 황무지와 초원의 원형 그대로 보존

김용만의 세계문학기행1-에밀리 브론테와 폭풍의 언덕


삭막한 황무지에 버려진 폐옥에는 캐서린의 유령 나타날 듯
슬픔, 죽음 등 극한 인간 감정 느껴보고 싶은 순례자의 발길 이어져

▲ 폭풍의 언덕■ 세계문학기행(1회)-에밀리 브론테와 『폭풍의 언덕』



영국을 여러 번 다녀왔지만 그토록 소망해온 워더링 하이츠 탐방은 그쪽으로 빠지는 길목에서 어긋나곤 했다. 셰익스피어의 고향 스트렛포드에 다녀올 때도, 제인 오스틴의 기념관이 있는 초튼에 다녀올 때도, 세계7대 불가사의인 거석 유적지 스톤헨지에 다녀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만큼 『폭풍의 언덕』 현장을 찾아가려면 어려움이 많았다.

교통편이 복잡하고 편의시설도 열악한 데다 승용차를 이용하자니 길이 울퉁불퉁하고 주차요금도 턱없이 비싸다. 폭풍이 몰아치는 무어(황무지)의 삭막한 이미지와 히스꽃이 만발하는 초원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려는 지방정부의 시책 때문이다. 다른 데 같으면 관광객의 편의가 우선일 텐데 하워드는 원형 보존이 우선이었다.

이처럼 관광이 불편한 곳인 데도 연간 8만 명이 이곳을 찾는데 그들은 모두 슬픔, 장엄, 허무, 죽음, 초월, 증오, 광기, 복수, 애정 등 인간 감정의 극한적인 돌기만을 느껴보고 싶어 찾아오는 모험가들이다. 삭막한 황무지 복판에 버려져 있는 폐옥과 외롭게 서 있는 활엽수를 보고 있노라면 그 경관만으로도『폭풍의 언덕』분위기를 온전히 느낄 수 있다. 광활한 분지에 황혼이 지고, 눈보라가 치고, 폭풍이 몰아치는 장면을 상상하면 저절로 가슴이 뛴다.

▲ 목사관
상상해 보라! 캄캄한 밤에 번개라도 칠 기미가 보이거나 달빛이 어스름하게 깔릴 무렵이면 캐서린과 히스크리프의 두 유령이 손을 잡고 황무지를 걷는 모습을. 눈보라치는 겨울밤 캐서린의 유령이 창가에 나타나 들여보내 달라고 통곡하던 히스클리프의 집터를.

능선에 구름이 끼고 바람만 스쳐도 분지 어디에서 귀신 울음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인간적인 갈등이 전혀 숨쉴 수 없는 이 낭만어린 황무지에서 스물아홉 살의 병약한 에밀리 브론테가 죽음을 1년 앞두고 인간 탐욕의 가장 깊은 극점에 불을 지핀 곳. 사랑과 증오가 보편성이 전복된 채 황무지에 나뒹굴고 있는데, 그 상처투성이의 애증은 괴기스럽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고 참혹하기도 하다.

『폭풍의 언덕』의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하지만 작가가 하인 넬리와 세입자 록우드 두 화자를 통해 이야기를 특이하게 전개시킨 이 작품은 인물의 광기 어린 역동성과 긴박한 묘사가 독자를 긴장시킨다.

또 이 소설은 인간의 정열이 모욕받았을 때 복수와 증오로 이글거리는 사랑의 왜곡을 담고 있다. 임종을 앞두고도 히스크리프와의 마지막 이별이 아쉬워 몸부림치다가 실신하는 캐서린의 광기, 복수에 불타는 악마적인 히스크리프의 집념, 원수 히스크리프를 쫓아다니는 힌들리의 파괴적인 잔인성, 그리고 눈보라치는 창가에서 “들여보내 달라.”고 통곡하는 망령의 애절함은 아무리 허구라 해도 처절하고 박진하다. 다음은 히스클리프가 평생 사랑해온 캐서린의 시체 앞에서 울부짖은 말이다.

“캐서린!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대 역시 편치 못할 거요. 그대는 내가 그대를 죽였다고 말하였소. 그렇다면 귀신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나 주오! 죽임을 당한 사람은 자기를 죽인 사람 앞에 귀신이 되어 나타난다고 했소. 어떤 형체로든지 나와 함께 있어 주오! 차라리 나를 미치게 해 주오!”

여기에서 모든 독자들은 눈물을 흘리게 마련이다. 그 눈물은 인류가 존속하는 동안 흘릴 수밖에 없는 슬픔의 은유다.

▲ 목사관 내부
중심인물을 그런 그로테스크한 성격으로 설정한 에밀리 브론테는 이제 귀신을 동원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귀신이 아니면 에밀리는 자기가 그리려 하는 사랑을 형상화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귀신을 가장 순결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진실된 사랑의 구경적 실체로 설정하려면 현실원칙에 충실한 체질로는 불가능하다, 요컨대 작가 에밀리가 죽음의식에 빠져 있었기에 그 설정이 가능했다는 말이다.

에밀리에게 있어 죽음은 신성하고 친숙하고 아름다운 형태였다. 그녀는 자기가 쓴 190여 편의 시 속에서 죽음이란 단어가 사랑과 생명 다음일 정도로 빈번히 나온다. 오죽해야 히스클리프의 입을 빌어 “내게는 죽음과 지옥뿐”이라고 말했을까.

세계문학에는 각가지 사랑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 많지만『폭풍의 언덕』의 히스크리프와 캐서린의 사랑만큼 낭만적이면서도 그로테스크하고, 아름다우면서도 뒤틀린 사랑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버트란트 러셀이 에밀리 브론테에게서 어떤 비장한 영웅성을 떠올린 반면 언니인 샬롯 브론테에게서는 가정교사의 왜소함이 느껴진다고 말했지만, 에밀리의 오빠 브랜웰이 그렸다는 자매의 초상화 중에서 에밀리의 모습을 보면 그녀에게서는 엄숙하고 황량하면서도 신비스러운 비극미가 느껴진다. 그리고 그런 특성 역시 『폭풍의 언덕』에 그대로 육화되어 있다. 하지만 에밀리의 소설이 제대로 평가를 받게 된 것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인 20세기에 들어와서다. 서머세트 모음이 『폭풍의 언덕』을 세계 10대 명작에 넣었던 것이다.

▲ 에밀리 브론테가 태어난 솔톤의 집
에밀리 브론테는 1818년 7월 30일 영국 요크셔 주의 솔톤에서 목사인 아버지 패트릭 브론테와 문학적 재능이 풍부한 어머니 마리아 브란웰 사이에서 1남 5녀 중 넷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두 살 때 아버지가 하워드 교구목사가 되자 그곳 목사관으로 이주하게 되고, 이듬해에는 어머니를 암으로 여의게 된다. 1824년 랭커셔 주의 사립 기숙학교인 코언 브리지에 입학한 에밀리는 언니 마리아, 엘리자베스, 샬롯과 함께 기거했는데, 이 학교는 훗날 샬롯이 쓴 『제인에어』에 등장하는 로우드 기숙학교의 배경이 된다. 에밀리는 부모한테서는 침울하면서도 정열적이고 기지가 풍부한 아일랜드적 기질을 물려받았고, 그녀가 성장한 하워드에서는 절도 있고 과묵한 요오크셔 지방의 기질을 체득했다.

폐결핵 환자였던 에밀리는 오빠 브랜웰의 죽음 때문에 더 단명하게 된다. 오빠가 1848년 9월에 죽자 에밀리는 오빠의 죽음에서 받은 심리적 타격과 장례 때의 무리로 폐결핵이 악화되어 그해 12월 19일에 세상을 뜨게 된 것이다. 그녀는 의사의 내진이나 복약은 물론 침대에 눕는 것마저 거부하다가 끝내 소파 위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세계문학에는 각가지 사랑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 많지만 『폭풍의 언덕』의 히스크리프와 캐서린의 사랑만큼 낭만적이면서도 그로테스크하고 아름다우면서도 뒤틀린 사랑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에밀리의 소설이 제대로 평가를 받게 된 것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인 20세기에 들어와서다. 서머세트 모음이『폭풍의 언덕』을 세계 10대 명작에 넣었던 것이다.

나는 폭풍을 좋아한다. 폭풍에는 마성(魔性) 못잖게 슬픔도 녹아 있다. 악마성과 천사성이 조화를 이룬 바람, 그게 폭풍이다. 황량한 초원에 몰아치는 폭풍의 갈기에서 느껴지는 건 공포감보다 더 진한 비장감이다. 애련하면서도 장엄한 그 감정 속에는 일상이나 상식으로 쉬 지각할 수 없는 초월성이 우글거린다. 그러니 폭풍을 좋아하는 체질은 잘 먹고 잘사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고요함만이 그리울 뿐이다. 폭풍이 지나간 후의 고요는 일상의 고요가 아니다. 비평가 세실(David Cecil)은 폭풍과 고요가 공존함으로써 우주의 조화가 유지된다고 말했다.

에밀리 브론테가 죽은 지 160년이 지났다. 하지만 그녀는 히스클리프나 캐서린의 유령처럼 황무지 어디쯤에 유령으로 존재할 것이다. 자신을 신비한 세계로 끌고감으로써 히스크리프의 악마적인 야수성을 창조해낸 에밀리. 삭막한 황무지로 에둘러진 공동묘지 한 복판에서 허무를 안고 외롭게 성장한 에밀리. 폐결핵이라는 치명적인 병을 앓으면서도 문학을 생명의 양식으로 여기다가 30세의 처녀로 생을 마감한 에밀리. 나는 그녀의 유령을 만나기 위해 브론테 다리를 건넜고, 브론테 폭포수에 손을 적셨고, 폭풍의 언덕을 거닐었다. 그때 나는 분명 보았다. 갑자기 맑은 하늘에 먹장구름이 끼면서 언덕을 휩쓸며 지나가는 억센 바람결을.

나는 그 바람을 쐬러 하워드에 또 가야한다. 갈 것이다. 가능하다면 거기서 죽고 싶다.

/글 김용만 소설가




필자 김용만 소설가는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중학교를 나오고,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덕분에 전국 사투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생계를 잇기 위한 힘겨운 사투는 그를 ‘체험 작가’로 만들었다. 『현대문학』에 늦깎이로 등단한 후 경희대 대학원 국문과를 수료했다. 특히 첫 소설집 『늰 내 각시더』(실천문학사)를 출간하면서 정통 단편소설 미학과 독특한 향토적 문체로 문단의 큰 관심을 모았으며, 『인간의 시간』(문이당), 『칼날과 햇살』(중앙M&B), 『아내가 칼을 들었다』(랜덤하우스) 등 잇따라 문제작을 발표했다. 지금은 경기도 양평 잔아문학박물관 관장으로 국내외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소설쓰기에 몰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