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3년 당시 묘역. 앞이 권준의 묘이고 뒤가 외증손 한상질의 묘이다
당시 도굴된 흔적을 발견한 청주 한씨 문열공파 종중은 묘의 지하 내벽부분에 그림으로 보이는 채색(彩色)들이 보이자 국립중앙박물관에 제보를 하게 되었고, 곧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그런데 발굴조사 중 그 분묘 남서쪽 모퉁이로부터 남쪽으로 80~130㎝ 떨어진 지점의 땅 속에서 네 조각으로 분리된 묘지석(墓誌石)이 나오고, 분묘 내부에서 묘지석의 석편(石片)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석편을 합쳐보니 하나의 묘지석으로 복원되었다. 발굴 작업 당시 현장에 있었던 청주한씨 종인들과 묘지기는 출토된 그 묘지석이 1980년경 분묘 내부 입구에서 처음 발견되었다고 확인을 해 주었다.
▲ 권준 묘 석실 북벽의 인물상. 왼쪽의 인물이 묘주인 권준의 진영으로 추정되고 있다.
묘지석에는 ‘증시창화권공묘명(贈諡昌和權公墓銘)’이란 제액 아래 ‘유원고려삼한벽상공신삼중대광길창부원군권공묘지명 병서’(有元高麗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吉昌府院君權公墓誌銘 幷序)라고 기재되어 있고, 권준의 생전 행적과 증조, 조, 부 및 자녀, 손(孫)에 이르기까지의 가보(家譜), 그리고 장지(葬地)를 생전에 선정하여 분묘를 조성한 경과 등이 기록되어 있었다. 권준이 사망한 해는 1352년 7월 14일로 그의 나이 72세 때다. 이 묘지명은 당대 대제학이던 이인복(李仁復)이 지은 것이다.
또한 분묘 내부에서 청자편과 동전 등이 발견되었는데 제조시기가 권준이 살았던 시기와 일치하고 내부 벽화의 특징도 마찬가지였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사실과 결정적으로 묘지석의 정확한 기록에 의하여 대법원에서는 이 묘가 한상질의 묘가 아닌 권준의 분묘이고, 권준의 후손은 이 분묘에 관한 분묘기지권을 취득하였다고 판결하였다.
▲ 권준의 글씨
그렇다면 이 분묘의 주인공 권준의 묘가 어떤 경위로 청주한씨 문중에서 관리해오게 되었을까? 우선 권준이 누구인가를 알아보자.
권준은 안향의 뛰어난 제자로서 일찍 과거에 급제해 충렬‧충선‧충숙‧충혜‧충목의 다섯 왕을 섬기고 정1품 삼중대광의 벼슬까지 올랐던 권보(權溥)의 큰아들이다. 권보는 당대 최고 학자 이제현과 왕자 두 명을 사위로 두었는데. 아들 다섯과 사위 셋, 그리고 본인까지 모두 9명이 봉군(군의 작호를 받는 것)되어 9봉군 집안으로 최고의 가문이라 일컬어졌다.
권준은 과거에 급제하여 충선왕을 중국 연경에서 만나 대언(代言)에 발탁되고, 원나라 왕에게 아뢰어 무위장군합포만호(武衛將軍合浦萬戶)에 임명되었고 그 후 밀직부사(密直副使)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올랐다. 그 당시 충숙왕은 원나라 조정과의 여러 외교업무를 권준에게 맡겨 자주 원나라를 왕래했다. 조적(曺頔) 등이 충혜왕을 모함하여 심양왕(瀋陽王) 고(暠)에게 왕위를 넘기도록 책동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심왕에게 붙었으나 권준만은 의리를 지켜 변하지 않았다.
▲ 권준의 묘역이라고 밝혀진 후 안동권씨 추밀공파 종중에서 권준의 묘비를 세웠다.
변이 평정되자 첨의찬성사에 임명되고, 또 조적이 패하자 충혜왕은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으로 봉하고 권준의 집에 부원군의 청사를 열어 관원을 두게 하였다. 충목왕이 돌아가자 권준은 기로대신(耆老大臣)들과 원나라에 글을 올려 공민왕이 즉위하도록 노력했다.
권준의 글씨는 명문으로 일컬어지고 외손녀가 충혜왕 때 화비(和妃)로 책봉되어 권세와 부귀를 크게 누렸다. 충숙왕이 권준을 총애하여 문성공 안향의 옛집을 매입해 하사하여 강학처로 삼게 하기도 하고 금잔(金盞)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가속들이 죄를 지어도 순군(巡軍)이 감히 처벌하지 못할 정도였다.
특히 충숙왕이 권준의 집에 와 머물기도 하였는데 그 집의 아름다움이 국왕으로서도 당할 수 없겠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 자택의 호화로움이 대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세도를 믿고 뇌물을 받아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듣기도 했지만 그 풍요로움으로 베풀기도 잘해 30여 년 동안 10여 명의 승려에게 보시를 하여 절을 운영하게 하기도 했다.
한림학사를 지냈던만큼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아버지 보의 지시로 이제현과 함께 ≪효행록≫을 지었다.
권준에게는 두 아들 형(衡)과 적(適